𝑰𝒏𝒏𝒆𝒓 𝑻𝒉𝒆𝒂𝒕𝒓𝒆 : 의식의 극장
2024. 08. 08. Thu. - 10. 06. Sun.
윤선갤러리는 2024년 8월 8일부터 10월 6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 작가 죠셉 초이(Joseph CHOI b.1968)의 개인전 <Inner Theatre : 의식의 극장>을 개최한다.
작가가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간 것은 1992년이다. 성장기의 방황과 결별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이었을 뿐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북부 릴(Lille)에서 어학을 공부를 하던 중 파리로 학교를 옮긴 동료의 집에서 한국인 화가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자기 안에 잠재된 예술적 소질을 발견했다. 사립학교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했고 졸업 할 무렵 화가의 길을 걷게다는 결심을 했다. 사설미술학원인 그랑 쇼미에르(Grand Chaumière) 수강권을 끊어 그림을 연습한 초이는 1997년 베르사유 미술학교 3학년으로 편입을 하게 된다. 작업과 생계를 병행하면서 그가 마주했던 가장 큰 질문은 ‘자아’와 ‘자기 정체성’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내적 갈등을 초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업에서 유독 등장 인물의 얼굴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어려운 형편에도 작업을 놓지 않았지만 결국 위기가 찾아 왔다. 작업실 임대료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함께 작업실을 쓰던 연상의 프랑스 작가가 조건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파리 근교 몽트뢰유(Montreuil)의 벼룩시장을 찾았다. 장이 파할 무렵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해 버려진 물건들 사이에서 작가는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일생이 기록된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저 평범한 누군가였다. 아마 누군가의 유품이었던 것 같다. 사진 속에서 누군가의 일생을 읽었다. 그리고 버려진 사진 속 인물에서 초이는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옛그림의 인물이나 초상화 또는 사진수첩이나 앨범 등에서 얼굴을 찾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2008년 초이의 작품은 파리 미술학교 소속 갤러리 크루(Galerie Crous)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개인전을 열 수 있는 명예로운 기회를 얻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콜라주를 비롯해 여러 기법적인 실험을 통해 변화를 보여준다. 한 동안 기교적 수사에 도취되었던 작가는 오히려 본질과 멀어짐을 깨닫게 되고 다시 시선을 회화의 근원적인 물음으로 돌리며 지금의 작품에 이르게 된다.
초이의 회화에 접근하기 위해서 작가가 걸어온 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의 작업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연속적 행위이다. 작품에 그려진 인물, 대상, 공간, 색채 등은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에 축적된 것들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 화면에 드러난 이미지를 피상적인 이론으로 기술하는 것은 실체 없는 공허한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초이의 회화가 주는 첫 인상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이다. 가상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인물과 대상 그리고 공간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혼재 또는 낯설게 병치되어 나타난다. 모든 그림에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양 고전미술 속 인물들이 착용하고 있을 법한 몸에 딱 붙는 의상을 입고 있다. 초이의 인물이 취하는 동작은 서양미술사에서 쉽게 관찰되는 전통적인 초상화의 형식에서 가져온 것이다. 정면에서 살짝 측면으로 틀고 있는 상반신의 각도나 인물이 취하는 포즈나 손과 팔이 놓여 있는 위치 그리고 인물 뒤로 그려진 실내공간의 벽이나 광활한 풍경을 암시하는 배경 등에서 미술사의 인용이 읽혀진다. 물론 고전미술 어디서도 초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찾을 수는 없다. 전통 미술에서의 초상과 초이의 인물화는 밀접하게 닿아 있으면서 기능과 역할, 회화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멀리 떨어져 있다.
초이의 작품에는 빠짐없이 인물이 등장한다. 홀로 또는 둘 혹은 가끔 그 이상이 등장한다.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정형화된 얼굴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은 실내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인물의 수에 따라, 인물이 자리하는 공간적 배경에 따라, 인물에서 강조되는 부분에 따라 작품은 제목을 통해 쉽게 파악되듯 몇 개의 그룹으로 묶인다. 예컨대 ‘구성’을 뜻하는 ‘Composition’에서는 화면 구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장면(Scene)’은 어떠한 연극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으며, ‘생각하는 형상(Thinking Shape)’에서는 앉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벽 앞의 초상(Portrait in front of the wall)’ 연작에서는 고전 초상화에서처럼 실내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의 상반신만 나타나는데 여러 머리들이 괴기스러운 방식으로 목에 연결되어 있다. 그 밖에 ‘누군가의 손을 보다(Look at one’s hands)’ 혹은 ‘형상 연구(Study figure)’ 등과 같은 시리즈에서도 제목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 집중하고 있는 중심 주제를 읽을 수 있다.
작가는 회화가 지닌 여러 미학적 물음에 직면해 나름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주된 관심은 일관되게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인물은 다면적이고 분열적이다. 대부분 하나의 몸에 분열이나 증식 된 것 같이 두 세 개의 얼굴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사실적인 얼굴, 조각상을 닮은 얼굴, 고전미술에서 접할 수 있는 얼굴, 남자의 얼굴과 여자의 얼굴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한 몸에 여러 얼굴이 하나의 머리를 구성한다. 이들은 주로 눈을 감고 있다. 하지만 그 얼굴이 발산하는 분위기는 차분하고 명상적이라기 보다는 감정이 제거된 느낌이다. 아무런 표정도 어떤 움직임도 없다. 중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듯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이다. 이것은 의식의 무중력 상태이다.
작가는 창작을 위해 스스로를 의식의 무중력 상태로 몰아 넣는다. 중력, 다시 말해 끌어 당기려는 힘으로 부터의 자유는 초이가 이미지를 창작하기 위해 설정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의 작업은 이미지의 종합이다. 이들은 주로 미술사에 나타나는 작품을 인용하거나 기억 속에 축적된 것 혹은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작가 노트의 짧막한 한 구절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소환하는지 잘 설명해 준다.
“오늘은 잠에서 일찍 깨어 산책을 나갔다. 아직 새벽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고, 시퍼렇게 멍든듯한 파란색 하늘을 보니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의 표정이 떠올라 그것을 그린다.”
작가는 출처가 다른 이미지를 창작의 첫 번째 영역인 의식의 무중력 상태로 끌어와 가공하고 해석해 자기만의 형상으로 다듬어 낸다. 초이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미지가 수집된다. 수집된 이미지는 색이 제거된 간결한 에스키스로 형상화 된다. 그리고 형상은 섬세한 드로잉으로 번안되거나 작은 크기의 화면에 옮겨지는데 흥미롭게 이 과정에서 파스텔 채색이 이루어진다. 색의 조화와 화면 구성이 다듬어지는 단계이다. 초이의 완성된 유화 작품이 발산하는 독특한 색감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초이의 색은 특정한 이론이나 논리를 추종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수단이다. 작은 크기의 파스텔화는 큰 크기의 캔버스로 옮겨져 유화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다면 죠셉 초이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을까? 작가의 작업 노트에 적힌 다음 문구가 이해를 도와준다.
“나는 기록한다. 나에게 그림은 언어이다. 하루의 이미지, 몇 달, 몇 년에 걸쳐 켜켜이 쌓인 나의 기억들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론 지워졌던 이미지들을 상기해 글을 쓰듯 그린다. 스쳐 지나갔던 장면과 심심한 일상,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중첩되거나 희미해진 채, 나만의 감각이 나만의 색감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채워나간다. 보통의 하루를 편안하게 이야기 하듯이, 나의 삶의 이미지와 색으로 이야기 한다.”
초이는 뚜렷한 기억이나 잠재 의식 속에 축적된 흐릿한 이미지를 의식화하며 기록하는 방식으로 그림에 남긴다. 작가는 작품이 창안되는 자신의 의식세계를 ‘연극’이 아니라 연극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극장’에 비유한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등장인물을 선택하고 특정한 의상을 입혀 어떤 행위나 상황을 캔버스 위에 연출한다.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전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만들어 내는데 초이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가끔 스스로가 그림 속 인물이 되어 어떤 포즈를 취하고 그것을 거울을 통해 관찰한 후 그림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캔버스에 펼쳐진 연극이 철저하게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작가에게 주어진 상상의 자유를 통해 모든 것이 작동된다. 초이의 연극은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바가텔(Bagatelle)의 느낌이다. 틀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꾸밈없고 담백한 완결성을 가진 단막극 같다. 등장 인물이나 그가 취하고 있는 포즈, 묘사된 상황과 그것이 벌어지는 공간적 배경은 암시적이지만 특정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누구나의 일상이 특정되지 않는 사건들의 연속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식과 몽환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무언극처럼 몸과 얼굴에는 논리와 비논리가 공존한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동기로 화면에 등장하지만 모두가 자기 내면으로 침잠해 있을 뿐 감상자와의 어떠한 직접적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객으로 작품에 초대된 감상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작품 속 상황을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초이의 연극적 회화는 관찰자의 감정이입을 요청하지 않는다.
죠셉 초이의 회화는 창작의 자유와 자율적 창작의 결정체다. 제한 없이 상상하고 제약 없이 표현한다. 어떤 의미를 상징하지도 어떤 사건을 서술하지도 어떤 현상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회화적 형식을 통해 적어도 캔버스 위에서만이라도 누릴 수 있는 절대에 가까운 자유, 그것에 대한 갈망과 표현이 초이의 회화세계이다.
* 이 글은 2024년 6월 25일 파리 북부 생-드니에 위치한 죠셉 초이의 작업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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